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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An artist of genius
천 재 화 가
한국 근대화단에서 약관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난 아소(我笑)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950년 비운의 총기 오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그 동안 몇 차례의 추모전과 유작전을 통해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들과 예술성 짙은 현존 작품들이 대대적으로 한자리에 전시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이중섭, 박수근 등이 국민적 화가로 부상하는 동안에도 조선미전 연속 6회 입선(1931-1936) 이후 불과 26세의 나이로 추천 작가에 올랐던 이인성에 대한 일반인의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화단에서는 그의 천부적 재능과 조형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이인성이 우리 근대화단의 신미술 도입과 정착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서 맨 앞자리에 설 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첫째, 초창기 근대화단에서 수채화가로서의 감각적인 기량과 기법의 숙련으로 탁월한 예술적 업적을
일궈냈다는 점,
둘째, 능수능란한 기량으로 정물화나 풍경화도 많이 제작하였지만 특히 인물화에서 한국적인
인물 표현을 정립하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고, 해방 이후 그의 향토적 소재와 화면구성, 색감 등이 박상옥, 류경채 등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국전(國展)의 한 지류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래에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를 비롯하여 <가을 어느날>(1932), <복숭아>(1939), <해당화>(1944) 등 불후의 명작들과 근대화단에서 가장 뛰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카이유>(1932), <아리랑 고개>(1934), <여름 실내에서>(1934) 등 정물화, 풍경화 외에도 작가 자신을 그린 몇 점의 <자화상>과 아내와 딸, 여학생 등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모델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 개성 넘치는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되고 전시되는 기회가 좀더 자주 생겨 그에 대한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질 것을 기대해 본다.
이인성(李仁星, 1912-1950)
1912년(양) 9월 28일 대구 출생
1928년(17세) 수창보통학교 졸업,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년(18세) 수채화 “그늘” 제8회 선전 입선
1930년(19세) 향토회 참가(1934년까지), 제9회 선전 “겨울 어느날” 입선
1931년(20세) 제10회 선전 “세모가경” 특선, 일본 퀸 크레옹 회사 입사
1932년(21세) 태평양미술학교 입학, 제11회 선전 “카이유” 특선, 13회 제전 “여름어느날” 입선
1933년(22세) 제12회 선전 “초하의 빛” 특선, 제14회 일본제전 “초하의 뜰” 입선
1934년(23세) 제13회 선전 “가을 어느날” 특선, 제15회 제전 “여름실내에서” 입선
1935년(24세)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6년(25세) 제17회 일본제전 “한정” 입선, 이인성양화연구소 개소
1937년(26세) 제16회 선전부터 추천작가 선임 및 출품
1945년(34세)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
1947년(36세)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 출강
1949년(38세)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년(39세) 6.25 당시 작고
1998년 월간미술 주간 <근대유화베스트10>에서"경주의 산곡에서"1위 선정
2000년 호암갤러리에서 작고50주기 회고전개최
2000년 <<이인성 미술상>>조례제정 대구
2002년 문화관광부2003년11월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