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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기고] 계산성당 옆 이인성이 섰던 자리 - 매일신문
  • 천재화가 이인성
  • 20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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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대구고검 사무국장을 하면서 대구에 1년 정도 살았다.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근대골목투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중 백미는 계산성당. 목조 십자형 한식(韓式)성당이 1년 만에 소실되자 프랑스 신부가 중국인 건축공과 함께 고딕 양식으로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전면 중앙의 국화 문양 스테인드글라스와 쌍탑형 첨탑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딕 양식이다.


특히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성당 한쪽에 서 있는 ‘이인성 나무’였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이인성 화백은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이고요. ‘계산동 성당’ 그림에 나오는 나무가 바로 이 감나무라예”를 들으면 이인성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감칠맛 나는 대구 사투리는 언제 들어도 흥겹다.

‘천재 화가 이인성’이 그린 ‘계산동 성당’(34.5㎝×44㎝)은 전통 기와지붕이 약간 보이면서 앙상한 나무 한 그루를 중앙부 왼쪽에 두고, 사제 숙소 벽면을 붉은 색조로 그린 수채화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인성 화백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계산성당 정면의 쌍탑형 첨탑을 그리지 않고, 중하위 부분의 사제관을 그렸을까? 그리고 앙상한 감나무 한 그루를 중앙 왼쪽에 넣은 구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쉽게도 그는 이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인성은 수채화와 유화 등을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기법으로 그림을 자유자재로 그렸다. 잘 짜여진 구도감과 담백한 유화를 보는 듯한 터치와 물감으로 그리는 수채화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만 38세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계산동 성당’을 보면 감나무는 ‘왜 열매와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줄기와 가지만 앙상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나무보다는 나무 뒤편에 보이는 성당의 붉은색 벽면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나뭇잎과 감을 생략한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마치 용맹스러운 사자의 모습을 그리면서 멋진 두상과 털 갈퀴, 눈과 이빨 그리고 발톱을 드러낸 앞다리를 그리는 대신 사자의 배 부분과 뒷다리, 꼬리 부분을 그린 격이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가끔 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 잡았던 곳을 찾아보곤 했다. 천재 화가의 눈으로 본 계산성당 모습과 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감나무를 기준점으로 살펴보니 한옥 기와집은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주차장이지만, 성당 건물은 거의 그대로였다. 감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성당 지붕 높이만큼 크게 성장했다. 또 한 가지 달라진 모습은 감나무와 성당 사이에 벤치와 등나무가 있는 쉼터가 설치되어 있어 성당 벽면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필자는 몇 번 그곳을 방문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인성 나무’가 아닌 ‘이인성과의 교감’이라는 콘텐츠를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천재 화가 이인성이 계산성당을 그리기 위해 이젤을 놓았던 자리를 찾아 표시하고, 그곳에 서서 계산성당을 바라보면서 그와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구에 근무하는 동안 쉼터를 옆으로 좀 이동시키고 이인성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섰던 장소를 설치하자고 몇 사람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경관보다는 역사성과 스토리텔링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서 세계의 미술 학도들이 이곳에 와서 천재 화가 이인성의 시각과 관점을 이해하고 교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치 한 젊은 남녀의 애틋한 순애보가 청라언덕을, 가수 김광석의 노래가 방천시장을 명품으로 되살리듯 말이다.



신호종 전 대구고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