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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화가 이인성
- 2017.08.21
- 6,447
이인성의 1942년작 ‘사과나무’ 91x116.5cm 캔버스에 그린 유화, 대구 명덕초등학교 소장 /사진제공=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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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북구 산격2동에는 ‘이인성 사과나무거리’라는 벽화거리가 조성돼 있다. ‘조선의 고갱’이라 불리는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을 기억하는 명소다.
그 이름의 계기가 된 이인성의 1942년작 ‘사과나무’는 늦여름 요맘때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사과를 담고 있다. 사과가 어찌나 탐스럽게 달렸는지 가지가 휠 듯하다. 자연의 풍요를 보여주는 푸름과 땅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붉음이 대조적이지만 두 색은 동그란 사과 안에도 공존한다. 세잔은 그림자와 음영처리를 검은색 대신 보색으로 처리했는데, 보색인 적색과 녹색으로 그린 이인성의 사과는 인상주의적 화풍이 느껴지면서도 독자적이고 토속적이다. 나무 아래로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이 보인다. 그 곁을 지키는 수탉은 해방의 새벽을 알리며 홰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지.
이 그림은 완성된 그 해 대구 명덕초등학교에 기증됐고 이후 197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맡겨졌다. 40년이 지난 2012년 이인성 탄생 100주년전을 개최한 미술관 측은 대구시교육청 등 소장처의 요청을 받아 그림을 대구로 돌려보내 현재는 대구미술관이 위탁관리 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찍이 20대에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鬼才)’라 불렸던 천재이나 한국전쟁이 나던 그 해 세상을 떠난 이인성은 심미의 절정을 추구한 천생 화가였다. 일각에서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시대비판적 작가이기보다는 체제순응적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화가였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정신적으로는 민감했고 그 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그림 곳곳에 기묘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름답지만 까닭 모를 아련함이 느껴지는 게 그 때문 아닐까 한다.미술평론가 최열은 이인성의 그림을 두고 “너무 우아하고 너무 화려해서 언제나 부담스러웠고 눈부셔 질투가 날 지경”이라 고백하며 “그의 화폭은 마치 귀족의 밀실처럼, 음모에 찬 구중궁궐의 일들은 따지고 보면 단순하되 드러나는 현상은 더없이 복잡한 것이 이인성의 모든 것이 그렇다”고 했다. 단순한 배경, 일상적 소재와 더불어 복잡한 상징들을 숨겨뒀기 때문이다. 이인성 특유의 낙천적 기질, 귀족적 취향, 설화와 상징에 대한 탐닉이 그림 곳곳에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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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적토(赤土)를 밟는 것이 청순(淸純)한 안정을 준다. 참으로 고마운 적토의 향기다”고 했던 이인성의 눈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산천의 아름다움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손끝에서 꽃이건 나무건 건물이건 ‘이인성식 시적(詩的)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났다. 1932년 선전 입선작인 ‘카이유’는 카라꽃의 일본식 이름인데 일본 황실이 소장하다가 어느 신하에게 하사품으로 전달된 것을 국립현대미술관이 발견해 1998년에 되찾은 그림이다. 흰색의 카라꽃은 회복을 기원하는 의미라 조국 광복을 염원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대구 ‘계산동 성당’은 실제 대상의 형태나 색에 연연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파스텔톤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 그려 인상주의 화풍을 막 받아들이기 시작한 우리나라 근대 수채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일본식 화풍이 맹목적으로 밀고 들어오던 시기였기에 작가만의 독자적 감성이 ‘한국식 서양화’를 이뤄낸 중요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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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은 사과가 한창 익어가는 늦더위의 끝물, 1912년 8월 28일에 대구 가난한 집안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천부적 재질이 있어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스케치를 다니다 아버지에게 화구통이 박살나기도 했다. 그 무렵 대구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영과회(0科會)’를 조직했는데 1928년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이인성은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입문한다. 이듬해 제8회 선전에서 ‘그늘’로 입선했고 약관도 되지 않은 젊은 화가의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다. ‘가을 어느 날’ ‘장미’ ‘여름 실내에서’ 등의 작품이 연달아 상을 받았다. 후원자가 따랐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풀 수 있게 일본 유학의 기회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림과 달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유학에서 돌아온 스물 네 살에 연애중이던 김옥순 씨와 결혼했고 대구 최초의 현대식 화실인 ‘이인성 양화연구소’도 열었다. 하지만 장녀 애향을 제외하고는 태어난지 얼마지 않은 아들과 딸을 연이어 잃었고 서른 한 살에는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두 번째 결혼 후 이화여중 미술교사로 서울살이 새 인생을 시작했는데 딸 하나를 낳은 후 부인이 가출해버린다. 1947년에 세 번째 결혼으로 안정을 찾나 싶었지만 1950년 6·25동란이 터진다. 전쟁통이던 그해 9월에 아들 채원을 낳고 뛸뜻이 기뻤던 것도 잠시다. 저녁 취중에 경찰과 시비가 붙었고 잘못 쏜 총에 맞아 다음 날인 11월 4일 날벼락같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백일도 못 본 아버지는 서른 아홉의 삶을 황망하게 마감했다.
거의 마지막 글이 된 1950년 2월 ‘신경향’에 기고한 ‘흰벽’에서 이인성은 예견한 듯 이렇게 적었다.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로움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라고.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