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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천재화가’ 이인성 화백의 아들, 이채원氏를 만나다 -KNS
  • 천재화가 이인성
  • 20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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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두류공원에 이인성동상에서 이채원氏, 2003년 대구시에서 건립<사진제공=이채원>
[KNS뉴스통신=강윤희 기자] 한국근대미술사의 ‘천재화가’로 남은 이인성 화백의 아들 이채원씨를 만나 아버지 이인성의 화가로서의 삶을 들어보았다.

 





다음은 이인성 화백에 대한 이채원 씨의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60여 년을 아버지라는 단어를 잊고 살아 왔습니다.

근대사에 가장 비극인 1950년 6·25가 이 땅에 발발하면서 그 해 아버지는 그림 속에 사라지셨고, 나 역시 아버지란 단어를 부르지 못했습니다. 내 이름을 지어 주시고 가신 아버지의 명성에 내 이름은 불리기 전에 늘 “자네가 천재화가 이인성의 아들이시죠”하며 그분의 명성에 뒷전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이인성은 미술선생님이었고 그분은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습니다. 

이인성은 1929년에 불과 17세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라는 당시 최고권위의 화가 등용문을 통해 처음으로 입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후 1937년 제 16회 조선미전 최연소 추천작가로 오를 때까지 8년간 <카이유(1932)>, <가을어느날(1934)>을 비롯해 조선미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 등 무려 12점의 입선과 6점의 특선을 하는 대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1944년 출품한<해당화>까지 16년 동안 30여 점 입선과 특선을 차지한 이인성은 화단의 촉망 받는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것입니다. 

  
▲ 1935년 제 14회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이인성의 대표작<경주의 산곡에서>갠버스에 유채<사진제공=이채원>
그의 남다른 그림 재주가 주위의 눈에 띄어 일약 천재화가로 조명 받은 것은 불과 2, 3년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그를 발탁해 준 몇몇 후원자들은 서둘러 그에게 일본 유학을 주선했고. 그는 동경에 있는 태평양 미술학교를 다니며 유학생활을 했지만 그 기간에도 국내 조선미전은 물론 일본의 ‘제전’에도 출품하여 연이어 입선의 성적을 올리는 등 단기간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여 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조선의 천재소년 이인성군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인성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당시 달리기 잘하는 아이를 보면 커서 “손기정 되겠네”하였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를 보면 커서 “이인성 되겠네”라고들 하였다 합니다. 

1945년 해방 후 대구를 떠나서 이인성은 이화여자중등학교에서 신봉조 교장님의 추천으로 미술교사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 6·25의 사변으로 우리 가족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수채화로 시작해 한국적 풍경과 풍물을 서구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적인 화풍을 우리의 향토적으로 그려낸 그의 유화는 우리 한국근대미술사에서 확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 됩니다. 특히 유화작품 <경주의 산곡에서(1935)>는 지난 1998년 평론가들이 산정한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서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의 예술세계는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강윤희 기자  kangyun1107@kns.tv